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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은... 무조건 여기고..."
중학교 1학년, 수학여행 가기 전 날 학교에서 틀어준 안전교육방송이 인상깊었던 정인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제일 안전하다는 버스 맨 앞자리를 선호했다.
동생은 서울에 몇 년 산 사람처럼 여기를 꼭 가야 되고, 이걸 꼭 먹어줘야 된다고 줄줄이 읊어주었고 신경도 안 쓰는 거 같던 형은 책상에 오만원 네 장을 내려놓았고 나갔다.
그렇게 양정인 인생 처음으로 교복 입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 시작된다.
목적지는 서울, 청담이었다.
2x3+9; 夏京冬釜
- 이번 역은 청담, 청담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
KTX를 타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5시간을 앉아있으니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에 치이며 겨우 역에서 나와 동생이 써준 '서울탐방리스트'를 보려는데 설상가상으로 폰도 꺼지고, 타이밍 좋게 브금으로 꼬르륵 소리도 깔린다. 난 어떻게 해야 돼...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는데 여자 둘이서 맛있겠다~ 하는 감탄사와 함께 어느 설렁탕집에 들어가고 있었다. 정인은 한 번도 설렁탕을 먹어본 적 없었다. 그야 부산에선 왜인지는 모르지만 설렁탕이 값도 있고 가끔 동네 설렁탕집을 지나갈 때마다 맡은 냄새는 딱히 군침 돋는 냄새가 아니었으니까. 내 돈 주고 먹긴 좀 아까운 음식. 딱 그거였다. 하지만 폰 꺼지고 배고픈 외지인. 여기에 슬슬 추운 것 같기도 한... 그런 정인에게 그 날의 설렁탕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을 거 같은 음식이 됐다.
인기가 많은 집인지 사람이 많아 몇 분을 서 있다 겨우 2인석에 앉았다. 메뉴판을 쓱 훑었지만 사실 설렁탕을 먹으러 들어온 거라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저 설렁탕,"
"두 개 주시고 메밀전도 하나 주세요."
주문하는 제 말을 자연스레 누군가 받아친다. 종업원도 아니고... 옷은 또 교복이다. 김승민. 남색 명찰에 자수로 박혀 있다. 누구냐고 물어보기 전에 또 먼저 정인의 말을 받아친다.
"같이 앉아도 돼요? 하루종일 굶어서 너무 배고픈데 자리가 없길래..."
"이미 앉으셨잖아요..."
"그 김에 같이 밥 먹어도 돼요?"
"이미 시키셨잖아요..."
"그래서 감사하다 하려고요. 감사합니다."
첫인상이 꽝이다.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이라 첫인상이 좋고, 나쁘고 할 것도 없겠지만 하여튼 꽝이다. 멍한 표정으로 '얜 뭘까'와 관련해 온갖 생각을 하는 와중에 '얜 뭘까'에서 '얜'을 담당하는 김승민이 제 앞에 숟가락,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앞에 놓인 김치 그릇에 석박지를 일정한 크기로 자른다. 그러고 자연스레 제 신상을 털며 정인의 신상을 궁금해한다.
"어디 학교 다녀요? 처음 보는 교복인데. 전 이 앞에 청담고 다녀요."
"저는 여기 안 살아요."
"부산 사세요?"
"어, 맞아요."
"사투리 써서... 몇 살이에요? 열 일곱?"
"어, 맞아요."
"설렁탕 나왔다."
"아, 진짜요?"
처음 먹어보는 설렁탕은 아까 밖에 맡았던 냄새 그대로였다. 그럭저럭... ... 좀 많이 맛있었다. 조용히 밥을 먹나 싶더니 그새 앞자리에서 말을 걸어온다. 아까 정인의 나이를 듣더니 말을 놓기로 결정한 건지 1분 전에 비해 말이 짧아졌다. 정인도 굴하지 않고 같이 짧아지기로 한다.
"오늘 다시 부산 가는 거야?"
"내일."
"아, 혼자 숙소에서 자고 가?"
"걍 밤 새려고."
"아..."
"..."
"근데 왜 자꾸 안 먹고 쳐다봐?"
"난 다 먹었는데?"
계속 떠들더니 금새 혼자 한 그릇을 비워놨다. 핸드폰도 없는지 자꾸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 세 숟갈 뜬 설렁탕을 3분만에 해치웠다. 가방을 안고 앞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이상하게 허전하다. 원래 이 곳에 손을 넣으면 네모난 것이 만져져야 하는데. 바지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가, 다시 가방 앞주머니를 살펴보았다가, 뒷주머니에 있는 짐들을 모조리 빼고 나서도 안 보였다.
"뭐 잃어버렸어?"
"... ... 없어."
"뭐가? 핸드폰?"
"... 지갑이 없어..."
그 순간 주마등처럼 30분 전 상황이 스쳐 지나간다. 지하철에서 내리기 세 정거장 전에 미리 지갑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랬는데, 지하철에서 내릴 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거. 그 때 지갑을 손에서 놓치고 정신이 없어 그냥 일어났던 모양이었다. 직접 보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 바닥에 쓸쓸히 제 지갑이 놓여진 장면이 생생하게 재생됐다. 폰도 꺼진 상황이라 충전을 맡기고 계좌이체라도 해야하나 별에 별 생각을 하는데 승민이 언제 일어났었는지 갑자기 제 옆에서 나타난다.
"자릿값으로 내가 밥 샀어."
"... 뭐?"
"자리 없었는데 너 덕에 앉아서 밥 먹었잖아. 그래서 내가 밥 샀어."
"어? 아니야. 그걸 너가 왜 사. 나 돈 있어."
"아는데 지금 낼 수 있는 상황 아니잖아."
"... 계좌번호 알려주면 내가,"
"정 미안하면..."
"..."
"오늘 하루 나랑 놀자. 내가 서울구경 제대로 시켜줄게."
그렇게 정인은 승민이 자주 간다는 피씨방에 핸드폰 충전을 맡겨두고 본격적인 서울 여행을 시작했다. 물론 나중에 집에 도착해서 정인은 동생이 써준 '서울 탐방 리스트'대로 제 서울여행을 조작해 동생에게 자랑했다.
처음 둘이 도착한 곳은 승민의 학교였다. 여기서 놀 게 있냐는 정인의 물음에 승민은 능청스럽게 그냥 제가 두고 온 필기노트를 가지러 왔다고 답했다. 교실 끝에 가만히 서 있는 정인에게 승민은 칠판에 -정인이 왔다 감- 이런 거라도 기념으로 남기라며 냅다 분필을 쥐어주었다. 정인은 여기가 무슨 분식집이냐고 투덜댔지만 승민이 필기노트를 찾으러 뒷 쪽 사물함에 간 사이 빠르게 -정인이 왔다 감-을 적었다. 후에 그 낙서를 발견한 담임 선생님께 옆 반 박정인이 대신 혼났다는 사실을 둘은 몰랐을 거다.
그 이후엔 정말 평범하디 평범한 장소들의 연속이었다. 특히 승민이 되게 부끄럽고도 뿌듯한 표정으로 안내했던 인생네컷은 정인이 12시간 전 부산에서도 찍고 온 것이었다.
"정인아... 이거 한 번만 써주면 안 돼?"
"이거 리본 머리띠 아냐? 이걸 내가 왜 써?"
"원래 여기선 다 이런 거 써."
"그러면서 넌 아무것도 안 써?"
"응!"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인천에 있는 해변이었다. 제가 끝내주는 서울 구경을 시켜주겠다 해놓고 마지막 코스는 지하철 타고 달려온 인천이라니. 서울이든 인천이든 상관은 없었다. 근데 승민이 하는 말이 참 사람을...
"약오르게 하네..."
"응? 누가?"
"너가. 여기 일몰이 예쁘다며?"
"응. 그래서 데려왔지."
"일몰 예쁜 곳을 해 다 지고 밤에 데려오니?"
"그건 나도 안타까운 부분이야. 근데 여기 별 진짜 예뻐."
"바다도 부산에서 볼 수 있고 별도 부산에서 볼 수 있거든? 안 놀랍거든 하나도?"
"그 대신 부산에는 내가 없잖아."
"... 에?"
"바다랑 별은 같이 보는 사람이 중요한 거야."
하여튼 오늘 하루동안 느낀 건데 승민은 말을 참 잘한다. 말만 잘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평범한 코스들이었지만 은근 알차게 돌아다닌 곳은 많아서인지 말 없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앉아있으니 나른해졌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해가 뜨고 있었다.
"일어났어?"
"뭐야? 나 이러고 그냥 바닷가에서 잠든 거야?"
"응. 너무 잘 자서 못 깨웠어."
"너는? 여태 밤 샜어?"
"나도 잤지."
"살다살다 바닷가에서 잠도 자네."
"우리 그래도 나름 그냥 일출 보러 일찍 온 사람들 같아보일걸?"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서울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그리고 2시간 뒤 승민의 입에서 나온 건 -여기 설렁탕 두 개 주세요.- 였다. 어제 설렁탕 맛있게 먹길래 또 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한테 나름 의미있는 장소라나 뭐라나... 딱히 나눌 말도 없어 멍 때리듯 옆에 세워진 메뉴판만 쳐다보는데 승민이 무언갈 쓰윽 내민다. 핸드폰 충전 맡겼던 거 찾아왔어. 핸드폰을 받아들자마자 정인이 계좌를 물으니 제가 계좌번호를 못 외웠다며 계좌번호 대신 핸드폰 번호를 준다. 부산 도착하면 연락해.
"나중엔 내가 부산 놀러갈게."
지하철 역에서 승민은 가장 황당한 멘트를 날린다. 어쩌다 만나서 하루 논 사이에 다음엔 부산에 놀러 오겠다니. 정인은 승민을 보러 서울에 온 것도 아니었는데. 너무나도 오래된 친구마냥 날리는 저 멘트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 도착했어? 9:33
응.
9:40 왜?
이틀동안 같이 놀아줬는데 고맙다고 말을 안 한 거 같아서.
그리고 계좌번호 알려줘. 어제 돈 못 준 거 다 보내줄게. 9:42
오전 9시 42분에 보낸 문자에 오후 9시 42분, 정인이 집에 도착하고 씻고 저녁까지 먹었는데도 답은 오지 않았다. 돈을 빌린 건 정인인데 왜 돈 문자는 승민이 답장하지 않는지. 3일 뒤 다행히도 누가 주운 건지 우편으로 제 지갑도 도착했는데 우편보다 빠를 승민의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민에게 답장이 온 건 그 해 겨울이었다.
8:56 정인아 자?
8:57 혹시 일어나면 터미널로 와줄 수 있어?
반 년만에 승민이 정인에게 보낸 건 제 계좌번호가 아닌 터미널로 와달라는 문자였다. 9시 반에 눈을 떠 그 문자를 본 정인은 수면잠옷에 패딩만 걸친 채로 5분만에 터미널로 달려나갔다. 어디있냐는 문자를 보낼 필요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터미널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저 검은 머리가 승민일 거라고 확신이 들었다.
"... 야."
"어, 빨리 왔네? 완전 오랜만이다."
"뭐야? 이 시간에 여기 왜 있어 너가? 아니 왜 갑자기 연락했어?"
"아... 줄 게 있어서."
"줄 거?"
"여기..."
김승민은 정말 양정인 인생에서 제일 이상한 남자였다. 초면에 자리가 없다며 갑작스럽게 합석을 하고, 서울에 지갑도 잃어버린 채 도착한 제게 설렁탕을 사주고, 하루종일 저를 데리고 다니며 서울 구경을 시켜주고, 인생네컷을 찍자며 제게 리본 머리띠를 내밀고, 서울 구경에서 갑자기 일몰이 예쁘다며 해가 다 진 후 인천 해변에 데려가고, 바닷가에서 같이 잠이 들고,... 그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와 반 년만에 재회한 이유가 고작.
"너 그 때 인생네컷 안 가지고 간 거 알아?"
"... 뭐?"
"이걸 서울에 두고 가면 어떡해."
"이거 주러 왔다고?"
"응. 우편으로 보내기엔 너 주소를 모르니까."
"연락을 했으면 됐잖아. 문자로 물어보면 되는 걸..."
"문자는 잠수 타는 중이라 답장을 못했지."
"그니까 그 잠수는 대체 왜 탄 거야?"
"돈 안 받으려고. 내가 그냥 자리값으로 밥 사준 거였다니까?"
"아니 그럼, 하... ... 너 부산 가는 차 몇 시야?"
"아직 예매 안 했어."
승민은 참 능청스럽다. 애초에 정인에게 인생네컷만 전해주고 바로 갈 게 아니었으면서 꼭 부산에서 놀다 가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정인이 꺼내게 한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으니 대답도 간결했다.
"그럼 오늘은 너가 부산 구경 해."
"알았어."
처음 승민과 설렁탕을 먹었던 기억을 살려 정인은 승민을 국밥집으로 데려갔다. 승민도 그 때가 생각났는지 가게를 들어서면서 피식 웃었다. 정인은 승민의 앞에 수저를 가지런히 내려놓고 물까지 떠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 돼지국밥 먹어봤어?"
"음... 안 먹어본 거 같은데."
"그치? 서울 사는 내 친구도 안 먹어봤다더라. 돼지국밥이 진짜 맛있거든. 서울 가면 맨날 생각 날걸?"
"맨날 생각나서 왔어."
"뭐야? 안 먹어봤다며."
"맨날 너 생각났었어."
"짜증나게 하지말고 물 마셔라."
"웅."
정인은 승민의 심정을 어느정도 알 거 같았다. 나름 재밌을 거 같아서 데려가는 곳이 족족 반 년 전 승민이 저를 데리고 다녔던 그 곳들이랑 비슷했다. 한 곳 한 곳을 들어설 때마다 피식 하고 나오는 승민의 웃음소리가 짜증났다. 그러다보니 오기가 생겨서 결국 정인은 승민을 데리고 바다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봐봐."
"뭐를?"
"하늘 봐보라고. 여기 별이 더 반짝반짝하지?"
"그러네..."
"..."
"나 그럼 내년에,"
"내년에도 별 보러 와."
"그래."
그 때처럼 바닷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반 년 전과 똑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밤바다를 보고 있는데 그 때와 달리 정신이 말짱했다. 정인이 나중에서야 다시 생각해보니 차마 잠들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었던 거 같았다. 동시에 인정하게 됐다. 첫 만남에 제 돈을 써가며 24시간을 함께 해주는 사람, 그 하루를 함께 한 사람을 보러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작정 오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몇 시에 출발할 거야? 차 미리 안 잡아도 돼?"
"아까 밥 먹으면서 잡았어."
"몇 신데?"
"9시."
"뭐? 지금 10신데?"
한껏 당황한 정인에 비해 정작 차를 놓친 당사자 승민은 태연하게 별구경 중이다.
"정인아."
"어, 왜? 대신 잡아줘?"
"너 오늘은 밤 샐 수 있어?"
언제나 그랬듯 겨울의 밤은 여름의 밤보다 길었다.
김승민
01/24 14:49
정인아 감기 조심하고 여름에 만나
